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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선교사의 삶과 사역

by 감사 153 2025. 2. 14.

 

서 론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선교사는 1885년 조선에 도착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중 한 명으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고 한글 성경 번역과 출판에도 힘썼습니다. 특히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제공했으며, 선교와 교육을 통해 조선 사회의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그의 삶과 사역을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한국 선교의 개척자, 아펜젤러의 사역 시작

아펜젤러는 18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 감리교 목회자로서 신학을 공부한 후 조선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인천항을 통해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조선은 당시 외국인의 활동이 제한적이었고,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아펜젤러는 한국어를 배우고 조선인들과 소통하며 선교의 기반을 다져 나갔습니다. 그는 개종을 강요하는 대신, 조선의 문화와 언어를 존중하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서적을 출판하고,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며 기독교 신앙을 조선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선교의 효과를 높였으며, 이후 한국 기독교의 성장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2. 배재학당 설립과 교육 선교의 기여

아펜젤러는 단순한 선교사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근대 교육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886년, 그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였습니다.

배재학당은 기독교 교육뿐만 아니라, 서양 과학, 수학, 문학 등을 가르치는 조선의 근대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기존의 서당 교육과 달리, 학생들은 교실에서 자유롭게 질문하고 토론하며 배웠고, 이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통해 조선의 젊은이들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곳에서 배출된 많은 인재들은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과 사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육이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조선의 미래를 바꾸는 중요한 요소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오늘날까지도 배재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기독교 기반 교육기관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3. 한글 성경 번역과 출판, 그리고 선교사의 희생

아펜젤러는 성경 번역과 출판을 선교의 핵심 과제로 여겼습니다. 당시 기독교가 조선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이 직접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한글 성경 번역 작업을 진행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 서적을 출판하여 조선 전역에 보급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기독교 신앙이 조선 사회에 깊이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교 여정은 끝까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902년 6월 11일, 그는 한글 성경을 배포하기 위해 목포로 가던 중, 타고 있던 배가 황해에서 침몰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는 익사 위기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다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희생적인 삶과 선교에 대한 헌신은 이후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으며, 지금도 많은 교회와 교육기관에서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결 론

아펜젤러 선교사는 단순한 외국인 선교사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와 근대 교육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그의 선교와 교육, 출판 활동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그의 헌신적인 삶을 기억하고, 그가 남긴 유산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의 신앙과 헌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가르침을 주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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